시이야기

저 등나무꽃 그늘 아래 / 김명인

자연을 바라보다 2012. 6. 10. 00:30




 


저 등나무꽃 그늘 아래 / 김명인



오늘은 급식이 끝났다고, 밥이 모자라서


대신 컵라면을 나눠주겠다고,


어느새 수북하게 쌓이는


벌건 수프 국물 번진 스티로폼 그릇 수만큼


너저분한 궁기는 이 골목에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부르면 금방 엎어질 자세로


덕지덕지 그을음을 껴입고


목을 길게 빼고 늘어선 앞 건물도 허기져있네


나는, 우리네 삶의 자취가 저렇게 굶주림의 기록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빈자여,


등나무꽃 그늘 아래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우리가 무엇을 이 지상에서


배불리 먹었다 하고 잠깐 등나무 둥치에 기대 서서


먹을 내일을 걱정하고, 먹는 것이


슬퍼지게 하는가


등꽃 서러움은 풍성한 꽃송이 그 화려한만큼이나


덧없이 지고 있는 꽃 그늘뿐이어서


다시 꽃필 내년을 기약하지만


우리가 등나무 아랫길 사람으로 어느 후생이


윤회를 이끌지라도 무료 급식소 앞 이승,


저렇게 줄지어 늘어선 행렬에 끼고 보면


다음 생의 세상


있고 싶지 않아라, 다음 생은


차라리 등꽃 보라나 되어 화라락 지고 싶어라





 

 

 * 김명인 시인

 

2000년 제4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 외에 6편의 시가 수상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김명인은 우수에 찬 만연체의 시구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관조적 자세의 시를 써 왔다.

 우울한 현실을 관찰하면서도 메마르지 않은 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는 등나무꽃 그늘이 있는 공원의 한 구석에서 펼쳐지는 무료 급식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힘든 현실을 슬퍼하면서 

"우리네 삶의 자취가 저렇게 굶주림의 기록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고 읊고 있다. 

생생한 묘사와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무거운 주제 의식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