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정호승

겨울부채를 부치며 / 정 호 승

자연을 바라보다 2014. 1. 17. 00:30

 

 

 

 

 

겨울부채를 부치며

 

                                             - 정 호 승

 

 

 

 

아들을 미워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인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나니

아들아 겨울부채를 부치며

너의 분노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게 하라

너는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구나

오늘밤에는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내가 눈사람이 되어 너의 집 앞에

평생 동안 서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손을 잡고 마라도에서 바라본

수평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면

지금쯤 너와 나 푸른 물고기가 되어

힘찬 고래의 뒤를 신나게 좇아갔을 텐데

아들아 너를 엄마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일은 미안하다

살아갈수록 타오르는 분노의 더위는

고요히 겨울부채를 부치며 잠재워라

부디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로 너의 일생이

응급실 복도에 누워 있지 않기를

어두운 법원의 복도를 걸어가지 않기를

나 다음에 너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면

겨울부채를 부치며

가난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아들이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