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이야기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 탁 번

자연을 바라보다 2014. 2. 3. 00:30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 탁 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께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던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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