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저녁의 편지 / 안 도 현 12월 저녁의 편지 -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 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안도현 2016.12.22
감자꽃 / 안 도 현 감자꽃 - 안 도 현 흰 꽃잎이 작다고 톡 쏘는 향기가 없다고 얕보지는 마세요 그날이 올때 까지는 땅속에다 꼭꼭 숨겨둔게 있다구요 우리한테도 숨겨둔 주먹이 있다고요 안도현 2016.05.16
개화 / 안 도 현 개화 - 안 도 현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 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 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 안도현 2016.03.08
바닷가 우체국 / 안 도 현 바닷가 우체국 - 안 도 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우체국이 있다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 안도현 2016.01.27
무식한 놈 / 안 도 현 ▲쑥부쟁이 ▼구절초 무식한 놈 - 안 도 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안도현 2015.10.05
강 / 안 도 현 강 - 안 도 현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안도현 2015.01.18
모기장 동물원 / 안 도 현 모기장 동물원 - 안 도 현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 형광등 불빛 따라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 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나는 한마리의 슬픈 포유류 책을 덮고 생각중이다 .. 안도현 2014.09.19
공양 / 안 도 현 공양 - 안 도 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안도현 2014.06.26
돌아누운 저수지 / 안 도 현 돌아누운 저수지 - 안 도 현 둑에서 삼겹살을 굽던 시절은 갔네 물 위로 일없이 돌을 던지던 밤도 갔네 저수지 그 한쪽 끝을 잡으려고 헤엄치던 날들도 갔네 청둥오리떼처럼 또 저수지를 찾아왔네 저렇게 저수지가 꽝꽝 얼어있는 것은 자기 속을 보여주기 싫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거라 .. 안도현 2014.01.29
외딴집 / 안 도 현 외딴집 - 안 도 현 그해 겨울 나는 외딴집으로 갔다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외딴집에 가서 눈 오는 밤 혼자 창을 발갛게 밝히고 소주나 마실 생각이었다 신발은 질컥거렸고 저녁이 와서 나는 어느 구멍가게에 들렀다 외딴집까지 얼마나 더.. 안도현 201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