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곳 / 안 도 현 중요한 곳 - 안 도 현 모악산 박남준 시인, 여름 밤 가끔 깨 활딱 벗고는 버들치들 헤엄치는 계곡 둠벙에 몸을 담근다 합니다 그러면 물속 버들치들이 허연 사타구니께로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도 아니고, 한꺼번에 검게 일렁이는 낯선 물풀 속에 잠이라도 청하자는 .. 안도현 2013.09.26
가련한 그것 / 안 도 현 가련한 그것 - 안 도 현 목욕탕에서 아들놈의 거뭇거뭇해진 사타구니를 슬쩍 보는 거 내심 궁금하고 흥미로우면서도 좀 슬픈 일이다 문득 내 머릿속에는 왜 이십 수년 전 아버지 숨 놓았을 때 염하는 사이 들여다본 형편없이 자줏빛으로 쪼그라든 그것이 떠올랐던 것일까 아무래도 아버.. 안도현 2013.09.15
바람의 두께 / 안 도 현 바람의 두께 - 안 도 현 씨근덕씨근덕 그렇게도 몇날을 울던 제 울음소리를 잘게 썰어 햇볕에다 마구 버무리던 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때맞춰 배롱나무는 달고 있던 귀고리들을 모두 떼어냈습니다 울음도 꽃도 처연한 무늬만 남았습니다 바람의 두께가 얇아졌습니다 안도현 2013.09.11
구월이 오면 / 안 도 현 구월이 오면 - 안 도 현 그대 구월이 오면구월의 강가에 나가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뒤따르는 강물이앞서가는 강물에게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물결로 출렁걸음을 옮기는 것을그때 강둑 위로지아비가 끌고 지어미.. 안도현 2013.09.04
옆모습 / 안 도 현 옆모습 - 안 도 현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 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 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당신하고 나.. 안도현 2013.08.21
나비의 문장 / 안 도 현 나비의 문장 - 안 도 현 오전 10시 25분쯤 찾아오는 배추흰나비가 있다 마당가에 마주선 석류나무와 화살나무 사이를 수차례 통과하며 간절하게 무슨 문장을 쓰는 것 같다 필시 말로는 안되고 글로 적어야 하는 서러운 곡절이 있을 것 같다 배추 흰 나비는 한 30분쯤 머물다가 울타리 너머 .. 안도현 2013.08.16
모퉁이 / 안 도 현 모퉁이 - 안 도 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가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 안도현 2013.08.12
간격 / 안 도 현 간격 - 안 도 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 안도현 2013.08.09
새와 나무 / 안 도 현 * 버찌( 벚나무 열매) 새와 나무 - 안 도 현 새가 날아와 산벚나무 마른 손목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산벚나무는 손목이 따뜻해져서 버찌를 마음껏 따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새는 버찌를 배불리 먹은 다음 모르는 골짜기로 날아가 기분 좋게 똥을 싸갈겼다 새똥속에 먼 훗날 어린 새들이 .. 안도현 2013.07.03
굴뚝 / 안 도 현 굴뚝 1 - 안 도 현 - 아궁이에서 굴뚝까지는 입에서 똥구멍까지의 길 비좁고, 컴컴하고, 뜨겁고, 진절머리나며, 시작과 끝이 오목한 길 무엇이든지 그 길을 빠져나오려면 오장육부가 새카매지도록 속이 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밑바닥에 닿는다, 겨우 2 저 빈집의 굴뚝을 들여다보면 매캐.. 안도현 201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