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 안 도 현 겨울 아침 - 안 도 현 눈 위에 콕콕 찍어놓은 새 발자국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간 새 발자국 한 글자도 자기 이름을 남겨두지 않은 새 발자국 없어졌다, 한순간에 새는 간명하게 자신을 정리했다 내가 질질 끌고 온 긴 발자국을 보았다 엉킨, 검은 호스 같았다 날아오르지 못하고, 나는 두리.. 안도현 2014.01.08
어느 빈집 / 안 도 현 어느 빈집 - 안 도 현 드러눕고 싶어서 나무는 마루가 되었고 잡히고 싶어서 강철은 문고리가 되었고 날아가고 싶어서 서까래는 추녀가 되었지 (추녀는 아마 새가 되고 싶었는지도) 치켜올리고 싶은 게 있어서 아궁이는 굴뚝이 되었을테고 나뒹굴고 싶어서 주전자는 찌그러졌을 테지 빈.. 안도현 2013.12.04
연탄 한 장 / 안 도 현 연탄 한 장 - 안 도 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안도현 2013.11.26
가을엽서 / 안 도 현 가을엽서 - 안 도 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것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2013.11.19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안 도 현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안 도 현 비닐 조각들이 강가의 버드나무 허리를 감고 있다 잘 헹구지 않은 수건처럼 펄럭거린다 몸에 새겨진 붉은 격류의 방향, 물결 무늬의 기억이 닮아 있다 모두들 한사코 하류 쪽으로 손을 가리킨다 안도현 2013.11.15
서울로 가는 뱀 / 안 도 현 서울로 가는 뱀 - 안 도 현 기어가는 것보다는 달려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뱀은 풀숲에서 아스팔트로 주저없이 나왔다 똬리를 튼 검은 뱀들이 줄지어 바삐 서울로 굴러가고 있었다 뱀은 자신이 곡선으로 기어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굴러가는 것들보다 더 빨리 서울로 .. 안도현 2013.11.07
푸른 신발 / 안 도 현 푸른 신발 - 안 도 현 푸른 신발 하나 강가의 모래톱에 버려져 있다 모래톱은 아직 물자국을 버리지 않고 울먹울먹 껴안고 잇다 주인이 신발을 벗어 멀리 내던졌는가 신발이 주인을 버렸는가 강물은 왜 신발을 여기에다 내려놓았는가 가까이 가서 보니 신발 안에 푸른 물이 그득하게 고여.. 안도현 2013.10.23
월광욕(月光浴) / 안 도 현 월광욕(月光浴) - 안 도 현 이즈막에 꿈이 하나 있다면 인적 없는 지리산이나 설악산 자락쯤 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입고 온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평평한 바위 위에 한시간쯤 드러누워 있는 것 하늘에서 천천히 기어내려온 달빛 벌레가 내 귓바퀴며 겨드랑이며 허리며 사타구니를 마음껏 .. 안도현 2013.10.19
적막 / 안 도 현 적막 - 안 도 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 안도현 2013.10.16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 도 현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 도 현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 안도현 2013.10.07